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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리얼리즘과 영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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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비전
기사입력 2018-04-06

▲저자: 이신 / 이은선, 이경 엮음     © 크리스천비전

   “인간의 노예상은 인간의 타락과 죄를 말해 주는 것으로서 이 타락은 특이한 의식 구조를 갖고 있어 단순히 회개하고 속죄하는 그것만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창조적인 활동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우리의 아버지요 스승이셨고 목사로서 신학자로서 그리고 알려지지 않았던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그렇게 길지 않은 생을 사셨던 고 이신 박사의 유고집으로 이 신박사는 1981년 12월 17일 오산리 순복음기도원의 한 좁고 쓸쓸한 방에서 운명하셨다.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노예상과 분열상이 오늘날 우리 한국인의 모습에서 더욱 부각되어져 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 책의 저자인 이신 박사는 신앙적 주체성을 강조하였으며, 신뢰의 그루터기를 회복하여 서로 화해하기를 원하셨고, 모든 사람 속에 있는 선한 상상력과 창조력을 일깨우기를 소망했다. 우리 새대보다도 오늘의 젊은 세대들, 우리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상상력의 부패라는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그 반대로 더 큰 가능성과 무한한 기회앞에서 자신들의 삶을 꿈꾸고 있는 젊은 이들에게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되리라 확신한다.      


   이 책은 제1부 전위 묵시문학의 신학-△묵시문학의 모호성 △역사상의 묵시문학 △묵시문학적 의식 △전위묵시문학△미래를 향한 묵시문학적 환상 제2부 슐리얼리즘의 신학- △환상의 신학-계시문학을 중심으로 △고독과 저항의 신학(키에르케고르와 본회퍼 신학의 비교연구) △전위예술과 신학 △슐리얼리즘의 신학  제3부 성령의 신학-△현대신학과 성령론 △카리스마적 신학 △하나님의 영과 적그리스도의 영 △이단이란 무엇인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인 이신 박사는 1927년 7월 7일 전남 돌산에서 아버지 이봉선 씨와 어머니 유금옥 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으로 건너가 부산초량상업학교(부산상고 전신)를 다녔다(1994년 졸업). 이신 박사는 이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사람들이 세운 부산 시립도서관의 미술서적을 거의 다 읽었을 정도로 미술에 관심을 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은행에 취직했고 해방을 맞던 해에 혼인을 했으며 1946년부터는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당시 좋은 직장으로 손꼽히던 은행원 자리를 그만두고 고생길이 훤한 신학을 공부하겠다니 부모님이 거세게 만류한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예술을 탐구하며 얻은 ‘근원적인 것’에 대한 갈구로 그는 미술도구를 모두 팔아서 서울행을 결행 감신대에 입학한다(1946년 봄). 1950년 5월 6. 25가 발발하기 직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충청도 전의에서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6.25가 터지자 고향인 전라도로 돌아가 활동한다. 당시 전라도 일대엔 초대교회로의 환원을 통한 교회 일치를 주장하는 자생적 기독교운동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환원 운동’이 일어났다.


   이신 박사는 1951년 광주에서 개최된 그리스도의 교회의 연합집회에 참석하였다가 ‘그리스도교회’가 성서적이며 근본적인 교회임을 깨닫고 당시 이 운동의 중심인물인 김은석 목사 등과 교류하여 환원해 목사 안수를 받고 충남 부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고 여기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했다. 자신의 이름을 이만수에서 이신으로 바꾼 것도 바로 이때였다.


   성령의 당해설을 주장하는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들과 달리, 성령의 현재적 역사를 체험하고 강조하여 선교사들과 대립한 끝에 부여교회를 사임, 전남 영암 상월리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하다 다시 상경해 힐 선교사를 만나 신학교 일을 도왔다. 그 후 충북 괴산 수리교회로 옮겨 목회하면서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부산에서 방송선교에 전념하다가 서울 돈암동 교회에 부임하여 목회를 했다.


   이 교회를 사임한 후 마흔 살 늦깎이 나이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림을 그려 학비를 조달하고, 고국에 있는 가족의 생계까지 짊어지는 고학 끝에 1967년 5월 네브라스카 크리스천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같은 해 8월 드레이크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드레이크 대학교를 한 해 다니다 1968년 9월 밴더빌트 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전학하여 신학석사 학위(1969년), 신학박사 학위(1971년)을 받고 귀국한다.


   귀국한 직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강사(문화신학)로 일했으며, 중앙신학교(윤리학), 그리스도신학대학(히브리어 및 신학), 대한기독교신학교(서울기독대학 전신, 조직신학)등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미국 출신 박사가 귀했던 시절 그는 출샛 길이 보장되었지만 주요 교단소속이 아니었기에 교수직을 얻기가 어려웠다. 소속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내 사정도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국내 어느 신학자도 따르기 어려울 만큼 영어와 일어는 물론 히브리어, 헬라어까지 능통한 지성이었지만 그는 주요 대학에 진출하지 못한 채 산동네 목회를 계속하였다. 그는 산동네에서 정신박약아 등을 모아 돌보면서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글을 모르는 부녀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부귀영화와 신앙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신념을 택하며 산 것이다. 또한 오직 ‘밥’만이 추구됐던 1960년대 미국 유학도로서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밥이 아니라 물질화하고 경직화해 창조적 상상력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경고하였고, 기독교 신앙의 한국적 자주성을 역설하였다. 허기진 물질적 곤궁 속에서도 그는 결코 창조성을 잃지 않았다. 그랬기에 비록 주요 교단으로부터 거의 주목 받지 못한 채 도외시 당했지만 그가 외친 광야의 소리는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다시금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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